본문
|
리서울갤러리는 4월 3일부터 29일까지 이혜민 작가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 ‘그리움’을 개최한다고 27일 밝혔다.
소박하고 서정적인 색채와 표현으로 ‘그리움’을 그리는 이혜민 작가의 작품들은 이 시대 복잡한 삶 속에서 잃어버린 유년 시절 순수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유년 시절의 모습들, 고향, 꿈, 사랑, 슬픔, 추억들을 볼 수 있다. 향토적 색채와 질감, 세밀한 소재표현, 절제되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승화된 미의식을 제공해준다.
리서울갤러리는 이번 전시에는 특히 봄소식을 전해주는 분홍빛 진달래가 들어간 그림이 많이 출품된다며 순수성과 감수성을 잃고 사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미술 작품 감상을 통한 힐링의 시간이 되어줄 이번 전시회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전시개요
-전시제목: 이혜민 개인전 ‘그리움’
-전시장소: 리서울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22-2)
-전시기간: 2019년 4월 3일(Wed)~29일(Mon)
-관람시간: 11am-6pm
◇작가노트
“세상에 모든 사랑. 인연이란 이름으로 만나고 헤어졌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재회한다. 그리움은 마음의 본향이다. 그래서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그릴 뿐이다” (2019년 3월 이혜민)
◇이혜민의 그림에 관하여
“저 소녀는 누구인가요?”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림을 보자 마자 묻기도 하고, 한참 들여다본 후에 묻기도 한다. 나와 나누는 첫 대화의 시작으로 묻기도 하고, 언제고 만나면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난감한 것은 정작 나 자신이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임에도 제대로 답을 해본 적이 없다. “작가 선생님의 어린 누이십니까?”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어릴 적 동무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아예 누구일 것 같다, 단정하고 확신에 차서 유추한다. 멋들어진 작품 평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한참 듣다 보면 그도 그런 것 같아 말미에는 “맞다”고 답하기 일쑤다. 어떻게 묻든 내 답은 듣는 이에겐 싱겁다. 저 그림 속 소녀는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해준다면 대화는 더 길어졌을 것이라 기대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로 가장 충실하게 답을 한 것이다.
그림 속 아이는 내 누이들이기도 하고, 어릴 적 동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따로 있다. 내게 그림 속 아이가 누구냐고 물은 이들 뿐 아니라 소녀가 그려져 있는 내 작품을 본 거의 모든 이들은 그들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게 누구냐고 물은 이들도 정작 그 안에서 자신을 본다. 그림 앞에서 소녀이던 과거의 자신을 본다. 그들의 누이를 보고, 동무를 본다. 어떤 이들은 그림을 보자 마자 탄성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며 “어! 나다” 하고 즉각 반응한다. 저기, 내가 있다고 반가워한다. 그리고 금세 눈빛은 과거의 어느 한 날로 돌아간다. 한참 서 있으면서 그림 앞에서 떠나지 못한다.
내 그림에 취한 건지, 자신의 추억에 취한 건지 알 수 없다. 아니, 둘 다일 것이다. 아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 어느 쪽도 상관없다. ‘그리움(情)’이라는 그림의 제목처럼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은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그립기 그지없을 테니 말이다. 지나간 시간은 아름답다. 빛난다. 소중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이 그다지도 아름다운 줄, 빛나는 줄, 소중한 줄 말이다. 그래서 그리운 것 아니겠는가.
나는 지나간 그 시간이 그립다. 아련하게 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시간이다. 내가 그리는 것은 소녀가 아니다. 지나간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저 소녀는 누구인가요?” 하고 또 내게 묻는다. 묻는 이의 눈에는 그리움이 한가득이다. 나는 답한다. “맞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이가 맞아요.” 거창한 평론이 내게 무슨 소용일까. 내 그림 앞에서 “저기 내가 있어요!” 하고 말하는 관객의 말을 듣고 있는데 말이다. 바로 내가 그리고자 한 것이다.
쉬운 그림, 어려운 깊이
내 그림은 쉽다. 쉬운 그림이다. 어려운 그림이 아니다.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지만, 사실 나와는 조금 무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작가인 내가 그렇게 쉽게 그리고자 한다. 어렵거나 힘을 주고 싶지 않다. 아는 이들만 보고 즐기는 그림이고자 하지 않는다. 어려운 이론으로 잔뜩 치장한 심각한 그림이기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작업하고 있지 않다. 내 작품은 관객에게 바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작품의 생명력은 관객과 소통하는 데 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홀로 독야청청 자기만의 예술 세계에 빠져 있는 것? 글쎄… 적어도 내겐 큰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다. 나는 관객이 내 그림을 보자 마자 알아차려도 좋다. 비록 내가 의도한 주제가 아니더라도 관객 스스로 감동의 코드를 찾아내 즐겼으면 좋겠다.
사실 그림의 주제란 보는 이의 몫이다. 작가가 의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의도한다고 해도, 또 의도한 대로 따라준다고 해도 관객은 이내 스스로 즐기고 느끼며 감동한다. 작가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다. 그리고 작가가 바라고 바라는 최상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또 묻고 싶을 것이다. 무엇과 소통하고 싶은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말이다. 꼭 전해야 하는 어떤 거창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에 어느 광고 카피처럼 쉽고 빠르게 알아채게 하고 싶은 거냐고 말이다. 내 작업은 크게 풍경과 인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인물을 그리는 ‘그리움(情)’ 시리즈를 보자. 이 시리즈의 키포인트는 무엇일까. 바로 추억이다. 유년 시절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은 참 따뜻했다. 어른이 된 지금의 시간과는 완전히 다른, 한없이 순박하기만 하던 때다.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부끄러운 듯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 따뜻한 볕이 잘 드는 여느 집 흙 담벼락에 동네 강아지와 함께 서 있는 소녀가 있다. 엄마는 어디 가셨을까? 젖먹이 동생을 업고 있는 누이의 귓가에 꽂힌 진달래가 처연하다.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두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뒷짐 져 가리기도 한다. 아이들의 긴 소매와 진달래, 개나리로 보건대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초봄이다.
담벼락의 낙서와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황토 색감의 배경 위에 얹히며 서정적이고 목가적 풍광을 자아낸다. 향토적이되 지방색을 배제했기에 이 작품 앞에 선 관객은 누구나 자신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보편적 추억의 정서가 어려워야 할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그 느낌에 어떤 이론이 더 필요할까. 작가로서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나는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붓을 든다. 그리고 내 그림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길 바란다. 그 추억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심연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저 그 문을 여는 문지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내 그림이 쉽다고 말할 수 있다.
추억의 시작, 양평
나는 서울 태생이다.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내 모습 또한 적당히 서울내기 같은 멀끔함이 있다. 그래서일까. 지극히 향토적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는 나를 보면 모두 의아해한다. 1950~1960년대에 시골에서 보낸 추억이 있을까 싶은가 보다. 내 배경을 모르는 관객에 한해서다. 물론 내 배경을 안다고 해도 나는 분명 서울 태생으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서울내기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나 알 법한 사실 한 가지를 더하자. 나는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는 서울의 어느 가난한 집 차남이다.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힘들던 부모님은 장남도 아니고, 갓 태어난 어린 아기도 아닌 나를 양평의 외갓집으로 보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럭저럭 앞가림을 하는 예닐곱 살 정도의 어린이 정도는 됐거니 싶겠지만, 양평 외갓집으로 보낼 때는 나 또한 갓 돌이 지난 아기에 불과했다. 난 양평 외갓집에서 일곱 살까지 살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울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럼 이 지점에서 궁금할 것이다. 겨우 예닐곱 해 정도 시골에서 살았다고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작업의 모티브가 될 수 있느냐 묻는다. 작가의 나이가 예순을 넘었는데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된다’다. 어릴 적 기억이란 게 그렇다. 어릴 적 경험이란 게 그렇다. 그 시간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지는 탓이다. 지극히 직관적 시간들이다. 세상 사는 셈법이 필요 없는 천진무구한 때 아닌가. 그리고 양평에서의 시간은 일곱 살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학식과 동시에 양평 외갓집으로 내려가 개학 하루 전에 돌아오곤 했다. 대학 입시를 치러야 하던 고등학교 3학년 한 해만 빼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분명 서울내기이면서도 서울내기가 아니다. 나는 양평 촌놈이다. 내 정서가 그렇다. 지금이야 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닿는 서울 인근 도시(?)지만, 당시만 해도 양평은 깡촌 중 깡촌이었다. 양평까지는 하루 종일 걸리는 먼 길이었다.
‘작가 이혜민’의 본격적인 시작
나는 예나 지금이나 시골이 좋다. 대학에 입학하고 취직해 직장에 다니면서 되레 양평에 가지 못했는데, 아마도 알게 모르게 그곳을 그리워하며 도시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나 의식과 무의식 속에는 ‘양평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60대라는 나이를 안고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문득문득 ‘내가 도회지에서 자랐다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형성된 그 정서는 내 일생 뿐 아니라 내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순수하게 작업만 하게 된 것은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늦은 편이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미술대학 진학만으로 만족하며 응용미술과에 입학했다. 부모님은 그림 자체는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이른바 ‘밥벌이’에 대한 염려는 크셨다. 기왕 하는 거, 취직이 될 만한 미술공부를 하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녔다. 그렇게 나는 도시 생활 속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꿈, 양평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되레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짙어졌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작업도 하고, 전시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전업 작가를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 늘 언저리 즈음에서 취미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돈 벌면 양평으로 들어가 작업한다는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고 말지 않을까 슬슬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나는 단단히 마음을 잡고 1992년에 양평에 터를 잡았고, 2003년에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내 마음 속의 풍경
지금도 작품에 낙서(?)를 그리고 있지만, 어려서도 낙서를 많이 하고 곧잘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학원에 다니며 배우거나 미술용품을 갖춰 놓고 그린 것도 아닌데 나는 그림 그리길 좋아했다. 그리고 많이 그렸다. 특히 말을 잘 그렸는데, 뛰는 말을 명암까지 넣어 그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우리 집 방 벽에 붙여 놓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하셨다.
“너는 화가가 되겠구나”하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미술 대회를 휩쓸었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미술 숙제로 제출한 그림을 보신 미술 선생님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고등학교 때에도 미술반 활동을 하며 늘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림은 언제나 나와 함께했다. 그것은 뭐랄까,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같은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운명이랄까. 그렇게 난 그림과 함께 60여년을 살았다.
나는 미술대학을 졸업했고, 언제나 미술계에서 활동했다. 그럼에도 양평 작업실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다. 작품과 작업 그리고 내가 완전히 밀착된 느낌이다. 60 평생 열심히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은 변함없건만, 진짜 작가라는 의식이 자리 잡은 건 양평에 터 잡은 후였다. 아마도 작업실로 들어오기 전까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작품은 크게 풍경과 인물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풍경을 많이 그렸다. 우리나라 중부 지역의 풍경이 주된 소재다. 아름다웠던 내 기억 속의 양평부터 나를 감싸고 있는 양평까지, 그리고 내가 보고 느낀 중부 지역의 풍광이 내 풍경화 세상이다. 여전히 풍경화는 나를 도전하게 만든다. 풍경 속에서 작가 이혜민을 보여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움을 그려내기까지
풍경화에 비해 인물화는 소소한 재미까지주는 작업이다. 나를 나타내기도 좋고, 보편적 정서를 표현하기도 적합하다. 아이를 통해 추억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푸근하고 따뜻해서 굳이 과거의 시간을 끄집어내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작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 그림을 보고 좋아해주는 관객을 볼 때다.
그림이 많이 팔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진 않는다. 내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 내 그림을 보러 일부러 시간을 내는 사람들, 그리고 내 그림 앞에서 웃고 우는 사람들! 글로만 써도 좋을 만치 작가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어쩌면 그 행복을 찾아 그림을 그리는지 모르겠다. 어떤 그림을 그리면 그들을 위로할까, 어떤 그림이 그들을 감동시킬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정체 모를 뿌연 감정의 덩어리가 내 안에 있었다. 분명하게 전해오는 그 느낌, 그러나 그것을 구체화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케치를 하고, 또 하고, 색을 칠하고, 또 칠하고…. 그렇게 20년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움을 그려내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헤매야 했다.
그러나 난 완벽하다고, 완전하다고 느낄 만한 그림을 그려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기준에선 말이다. 그래서 ‘그리움(情)’ 시리즈를 그려내기까지 25년이란 시간을 보냈듯, 앞으로 또 그만한 시간을 열심히 그릴 것이다. 관객과 더불어 작가인 나를 완전하게 감동시킬 작품을 그려내기 위해서 말이다. 힘든 시대다. 완벽이라 말하고 있지만 나라도 편하게 그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